들어가며 – 독일 문학, 그중에서도 ‘희곡’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
한국에서는 독일 문학이라 하면 괴테, 헤세, 카프카 같은 소설가 중심으로 소개되지만, 사실 희곡 분야야말로 독일 문학의 실험정신이 가장 강하게 살아 있는 장르다.
특히 현대 독일 희곡은 단순한 극작을 넘어서 언어 실험, 무대 철학, 사회 비판, 서사 해체 등 다층적인 예술의 장이다. 이 글에서는 비교적 덜 알려졌지만 예술성과 문학성이 뛰어난 현대 독일 극작가들과 그 대표작들을 소개한다.
1. 디어도어 슈트름 (Theodor Storm) – Der Schimmelreiter 희곡화 시도
디어도어 슈트름은 일반적으로 시인 혹은 소설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대표작 『회색말을 탄 기사 (Der Schimmelreiter)』는 오늘날 여러 실험극단에 의해 무대화되어 왔다.
원작은 소설이지만, 21세기 이후로 이 작품은 “자연재해와 인간의 한계”라는 주제를 현대적 언어로 변형해 극화된다. 특히 독일 극단 Thalia Theater Hamburg의 2012년 버전은 희곡의 형식을 빌려 다중화자 내레이션, 영상 투사, 소리 실험 등을 삽입해 슈트름 문학의 새로운 확장을 보여주었다.
추천 이유: ‘서사 중심’ 독일 문학에서 드문 비현실적 이미지와 심리 묘사의 결합. 번역 없이 원어로 음향과 리듬의 감각을 체험할 수 있음.
2. 마리 루이제 플라이서 (Marie Luise Fleisser) – Pioniere in Ingolstadt
플라이서는 브레히트가 주목한 몇 안 되는 여성 극작가 중 한 명이다. 『잉골슈타트의 개척자들』은 1929년 당시 금기였던 여성의 성적 욕망, 남성 중심 권력 구조를 날것 그대로 드러낸 작품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공연되는 이 작품은 ‘여성 인물의 침묵’과 ‘무대 위 비정형 감정’ 표현에 있어 브레히트와는 다른 서사적 저항을 보여준다.
추천 이유: 대사 하나하나가 숨겨진 감정 폭발로 읽히며, 원어의 모호하고 감각적인 표현들이 독일어 학습자에게 독특한 리듬 연습이 된다.
3. 미로 라우 (Milo Rau) – Das Kongo Tribunal
현대 독일어권 연극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적 연출가. 미로 라우는 단순한 희곡이 아닌 실제 재판 형식을 차용한 극장 퍼포먼스를 창조한다.
『콩고 재판』은 콩고 내전과 자원 수탈에 관한 실제 증언을 수집하고 재구성해, 배우가 아닌 실제 피해자들이 등장하는 극이다. 희곡 형식은 거의 존재하지 않지만, “현실을 희곡화”하는 새로운 양식으로 주목받는다.
추천 이유: 극작과 다큐멘터리, 윤리와 예술의 경계 해체. 독일어 문학을 통해 세계 현실을 사유하는 실천적 시도로 볼 수 있다.
4. 엘프리데 옐리네크 (Elfriede Jelinek) – Das Werk, Bambiland
노벨문학상을 받은 극작가 엘프리데 옐리네크는 문장과 문장이 이어지는 논리 자체를 파괴하는 작법으로 유명하다. 그의 희곡은 등장인물이나 줄거리보다는 언어 흐름 그 자체로 구성된다.
『다스 베르크』는 오스트리아 수력발전소 건설에 투입된 외노자들의 착취를 다룬다. 『밤빌란트』는 이라크 전쟁과 서구 언론의 포장을 신랄하게 비틀어낸다.
추천 이유: 독일어 학습자에게는 어렵지만, 희곡이 언어 실험의 최전선임을 보여주는 예. ‘의미가 아닌 리듬과 반복’에 익숙해질 수 있다.
5. 롤란트 슐츠 (Roland Schimmelpfennig) – Der goldene Drache, Wintersonnenwende
롤란트 슐츠는 현대 독일 극장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는 작가 중 하나다.
『황금 용』은 아시아 음식점 주방을 배경으로, 이민자 문제를 다층적으로 그리는 블랙코미디다. 현실과 환상이 뒤섞이고, 배우가 성별·나이를 초월해 여러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 『동지(冬至)』는 유럽 극우주의의 일상 침투를 은유적 스릴러 형식으로 풀어낸다.
추천 이유: 현대 사회 문제를 환상적 기법과 결합. 독일어를 통해 문학적 시선으로 사회를 읽는 힘을 길러준다.
추가 : 현대 독일 희곡 읽기 가이드
- 무조건 정독하지 말 것! 현대 희곡은 이해보다 감각이 먼저다. 소리 내어 읽고, 무대 장면을 상상하며 문장을 흐릿하게 음미하라.
- 등장인물이 불명확해도 괜찮다. 초현실적 희곡에서는 인물의 ‘정체성’보다 ‘역할의 상징성’이 더 중요하다.
- 스크립트 PDF 구하기: Suhrkamp Verlag, Rowohlt Theater Verlag 등에서 대본 구매 가능. 일부는 라이브러리에 무료 공개됨.
- 추천 낭독 채널: YouTube의 Schaubühne Berlin 낭독 시리즈, Deutsches Theater 공식 영상 등 활용.
마무리하며 – 소설보다 더 치열한 문학
독일 현대 희곡은 문학과 사회, 언어와 철학의 가장 첨예한 접점이다. 디어도어 슈트름처럼 ‘희곡으로 환생한 소설’부터, 옐리네크처럼 ‘의미를 거부하는 언어 퍼포먼스’까지, 이 장르를 이해하면 독일 문학을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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