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 K-드라마 속 익숙한 낯섦
K-드라마가 전 세계적인 인기를 얻은 이유는 무엇일까? 자극적인 소재? 감성적인 이야기? 사실 그 이면에는 낯선 형식과 실험적인 장치들이 숨어 있다. 이 글에서는 독일 연극 이론가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의 ‘서사극(Epik Theater)’ 개념이 K-드라마에 어떻게 간접적으로 스며들었는지 살펴본다.
2. 브레히트의 서사극 – 감정 몰입을 거부하다
브레히트는 관객이 무대 속 인물에 몰입하는 것을 거부했다. 대신 ‘소외 효과(Verfremdungseffekt)’를 통해 관객이 인물과 거리를 두고 비판적 시선으로 극을 바라보게 만들고자 했다. 그가 의도한 연극은 다음과 같다:
- 인물의 감정에 빠지지 말 것
- 서사를 중단하고 해설하거나 노래 삽입
- 무대 장치와 조명이 연극임을 드러낼 것
- 관객을 정서적 소비자가 아닌 이성적 관찰자로 전환시킬 것
이제, 이런 ‘소외 효과’가 현대 K-드라마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3. K-드라마 속 브레히트적 장치들
1) 캐릭터의 자기 인식 (메타 드라마 구조)
- 《이태원 클라쓰》, 《지금 우리 학교는》 등의 드라마는 종종 주인공이 스스로를 의식하거나 사회 구조를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대사를 던진다.
- 이는 브레히트의 “등장인물의 소외와 각성” 개념과 유사하다. 인물은 이야기 안에 있으면서도 그 이야기 바깥을 바라본다.
2) 장르와 현실 사이의 거리두기
- 《D.P.》는 군대라는 폐쇄적 공간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지만, 동시에 특정 장면에서는 설치극적 장면 전환이나 형식 실험을 감행한다.
- 이는 관객의 몰입을 일부러 깨뜨려, 사회 문제를 비판적 거리에서 재조명하려는 브레히트적 접근이다.
3) 음악과 서사의 분리
- 브레히트는 극 중 삽입된 노래가 ‘감정을 돋우는 용도’가 아닌, ‘비판을 위한 중단’의 기능을 하기를 원했다.
- K-드라마에서도 배경음악이 극적 감정 고조보다는 아이러니나 반전의 장치로 쓰이는 경우가 늘고 있다. 예: 코믹 장면에 클래식, 슬픈 장면에 팝송 등.
4) 다큐멘터리적 서사 기법
- 《마이 네임》, 《소년심판》 같은 드라마는 다큐멘터리적 리얼리즘과 픽션의 극적 구조를 섞으며, 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을 드러낸다.
- 이는 브레히트가 극장이라는 환상을 깨고 현실로 돌아가고자 했던 시도와 맞닿는다.
4. 왜 하필 K-드라마에 브레히트의 그림자가?
브레히트의 연극은 단지 연극 무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는 사회 구조와 인간 사이의 거리를 실험하는 예술을 꿈꿨다. 이런 철학은 한국 사회의 급격한 변화, 계층 갈등, 정체성의 위기 등을 반영하려는 K-드라마의 성격과 자연스럽게 맞물린다.
또한 K-드라마 제작자들 가운데에는 영화, 연극, 철학을 함께 공부한 작가와 연출자들이 많아, 브레히트 이론을 ‘직접 학습한 세대’가 꽤 있다. 그들은 무의식적으로든, 의도적으로든 브레히트의 기법을 차용해 시청자에게 질문을 던지는 콘텐츠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5. 마치며 – 브레히트를 모르는 브레히트적 드라마들
K-드라마가 글로벌한 감성으로 성공했다는 분석은 이제 진부하다. 정작 우리가 주목해야 할 건, 감정 몰입이 아닌 이성적 거리를 유도하는 독특한 형식이다.
그리고 그 형식의 뿌리에는 1930년대 독일에서 ‘감정이 아닌 사고’를 강조했던 브레히트가 숨어 있다. K-드라마는 때로 브레히트를 몰라도, 브레히트적일 수 있다.
관객을 울리는 드라마가 아닌, 생각하게 만드는 드라마. 그것이 브레히트가 원했고, K-드라마가 점점 더 도달하고 있는 목표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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