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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문학

막스 프리슈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 스위스 연극의 거장들

by quidam87 2025. 4. 8.

1. 들어가며 – 알프스 너머, 독자적인 무대언어

독일어권 문학 하면 보통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작가들이 주목받는다. 하지만 스위스는 20세기 독일어권 연극의 가장 깊고도 날카로운 비판 정신을 품은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막스 프리슈(Max Frisch)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Friedrich Dürrenmatt)가 있다.

이 둘은 흔히 같은 시대를 산 스위스 작가로 묶이지만, 사실 정반대의 극작술과 사유 방식을 가졌던 존재들이다. 그들의 연극은 전후 유럽의 양심과 허위의식을 해부했고, 동시에 스위스의 ‘중립성’ 이데올로기까지 날카롭게 비꼬았다.

이 글에서는 이 두 작가의 작품 세계를 단순 비교하는 대신, 그들이 만든 ‘스위스적 연극정신’이란 무엇인지 조명하고자 한다. 그 정신은 단순한 주제의식이 아닌, 양심, 위선, 존재의 탈피 불가능성이라는 차원에서 깊이 있게 드러난다.

막스 프리슈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 스위스 연극의 거장들

 

2. 막스 프리슈 – 정체성과 자아에 대한 극적 실험

프리슈는 건축가 출신이다. 이 이력이 그의 극작술에도 고스란히 반영된다. 그는 연극을 통해 인간이라는 구조물이 얼마나 허약한지, 그 구조물의 설계도(정체성)가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파헤쳤다.

대표작 《안도라》(Andorra)에서는 주인공 안드리를 둘러싼 타인의 시선과 편견이 그의 정체성을 어떻게 조작하는지를 보여준다. 관객은 점점 그가 ‘유대인’이라는 사실보다, 사회가 그를 그렇게 인식하기로 결정했다는 구조에 주목하게 된다.

또 다른 작품 《비더만과 방화범들》(Biedermann und die Brandstifter)은 전형적인 ‘양심적인 시민’이 어떻게 파시즘의 공범이 되는지를 블랙 코미디로 드러낸다. 프리슈는 말한다: “선의는 면죄부가 될 수 없다.

그의 극작술은 단순한 도덕극을 넘어서, 관객이 무대 위 인물의 거울이 되는 불편한 경험을 제공한다. 이 불편함이 바로 프리슈 연극의 핵심이자, 오늘날까지도 유효한 이유다.

 

3.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 논리의 파괴자, 비극의 해체자

뒤렌마트는 철학자였다. 그리고 그는 그 철학을 무대 위에 폭탄처럼 투하했다. 《노파의 방문》(Der Besuch der alten Dame)에서는 정의를 가장한 복수, 자본의 윤리적 공백을 드러내며 관객에게 묻는다: “정의는 돈으로 살 수 있는가?”

그의 또 다른 대표작 《물리학자들》(Die Physiker)은 과학과 도덕,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관객에게 다음의 아이러니를 던진다:

“진실을 숨기려 했던 자가 가장 큰 재앙을 일으킨다.”

뒤렌마트는 극 구조를 의도적으로 뒤틀고, 비극을 희화화하며 관객의 기대를 배반한다. 그는 말한다:

“현대 세계에서는 고전적 비극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남은 건 비극을 가장한 코미디뿐이다.”

그의 무대는 혼란스럽고 조롱적이지만, 그 속에 감춰진 논리의 붕괴에 대한 극단적 윤리적 질문은 오히려 고전보다 더 강력하게 다가온다.

 

4. 프리슈 vs 뒤렌마트 – 양심과 냉소 사이

두 사람은 서로의 연극에 대해 비판적으로 발언하기도 했다. 프리슈는 뒤렌마트를 “감정 없는 냉소주의자”라 불렀고, 뒤렌마트는 프리슈를 “고상한 자기기만”이라 조롱했다. 하지만 이 충돌은 오히려 스위스 연극이 얼마나 다양한 사유의 토양을 품고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프리슈는 ‘나는 누구인가’를 물었다면, 뒤렌마트는 ‘어떻게 그렇게 믿게 되었는가’를 물었다. 전자는 자아와 책임을, 후자는 사회 구조와 거짓을 해체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들의 차이는 방법론일 뿐, 목적은 동일

5. 스위스적 연극정신 – 중립의 역설과 윤리의 모순

프리슈와 뒤렌마트의 연극은 스위스라는 특수한 맥락에서만 가능한 비판정신을 품고 있다. 중립국으로서 2차 세계대전을 ‘비껴간’ 스위스는 오히려 도덕적 책임의 회피라는 내상을 입었다.

이 두 거장은 그 상처를 직시했다. 중립이 정의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 개인의 양심이 공동체의 폭력성을 막지 못한다는 것, 그런 역설을 연극이라는 가장 직접적인 매체로 고발한 것이다.

하다: 현대 사회의 무의식에 균열을 내는 것.

 

6. 결론 – 무대 위의 스위스, 세계를 해부하다

막스 프리슈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는 독일어권 연극을 단순한 미학의 장르에서 윤리적 질문의 투사장으로 끌어올렸다. 그들의 연극은 지금 이 순간에도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고,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만든다.

  • 나는 정말 선한가?
  • 나는 책임을 회피하고 있지 않은가?
  • 정의는 누구의 얼굴을 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들이 살아 숨 쉬는 한, 프리슈와 뒤렌마트의 연극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스위스 연극의 정점’이 세계 연극사에서 차지하는 진정한 위치다.

그리고 우리는 그 무대 위에서, 결국 우리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